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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 逝世 450주년- 다시, 고봉을 만나다] 조선 최고의 지성들 ‘사단칠정’ 편지 쓰며 평생 교유 - 호남학과 김경호 교수 기고문

작성 : 관리자 / 2022-09-07 10:29
<1>고봉과 퇴계의 만남과 이별
전라도 고봉·경상도 퇴계, 26세 차이에도 깍듯이 예우·존중
“두 사람의 만남과 상호 교섭은 ‘공감장’이자 삶의 역사”
 
고봉 기대승을 기리는 월봉서원 전경(광주 광산구 소재).
올해는 고봉 기대승 서세 4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기획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주최하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주관하는 기념행사의 하나로 마련됐다. ‘다시 고봉을 만나다’라는 대주제 아래 고봉과 관련된 장소, 자연경물, 역사적 인물 및 문헌자료를 재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569년 3월, 고봉과 퇴계의 작별

1569년 3월 봄날, 고봉 기대승(1527-1572)은 한강의 동호에서 퇴계 이황(1501-1570)과 작별했다. 퇴계는 고향인 경상도 예안의 도산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직전 퇴계는 선조와 면담했다. 이 면담은 고봉이 주선한 것이었다. 퇴계와의 이별 전인 1568년 12월, 고봉은 즉위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선조에게 퇴계를 만나볼 것을 건의 하였었다.

고봉은 선조에게 당대 사림의 영수격인 퇴계를 추천하여 국정운영과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견해를 듣도록 요청하였다. 사림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고 있기는 하지만 불안정한 국정을 조정할 수 있는 인물로 퇴계를 추천하였다.

이러한 고봉의 건의가 수용되어 선조는 이듬해 1569년 3월에 퇴계를 불렀다. 왕과의 면담 자리에서 퇴계는 고봉을 ‘통유(通儒)’로 추천하였다.

통유란 유학에 해박한 학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퇴계는 고봉을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퇴계는 동호의 강가에서 예안의 도산으로 떠났다. 퇴계가 안동으로 귀향하는 날, 고봉은 전별하는 배 위에서 퇴계에게 이별의 시를 전했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찌하면 만류하리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

애에 가득한 이 시름을 어이하리

고봉의 시를 받은 퇴계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이니

돌아가고픈 마음 종일토록 매여 있네

이 한강수 떠다 벼룻물로 써서

끝없는 작별 시름 써 볼거나
 
조광조와 양팽손 죽수서원 유지 추모비.
퇴계가 서울을 떠나면서 고봉과 주고받았던 이 화답시는 이별의 심회를 애틋하게 보여준다. 떠나가는 선생님을 차마 붙잡지는 못하여 닻줄만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애에 가득한 시름’에 젖은 고봉의 심정이 처연하다. 퇴계는 훌륭한 후학들과 이별하는 아쉬움에 한강 물을 벼룻물로 다 쓸 정도의 한량없는 우수를 느꼈다.

고봉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이후, 강직하고 직선적인 성품과 언행으로 인해 탄핵당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퇴계는 그에게 ‘마음의 위안처’였다. 퇴계는 고봉을 책망하면서도 위안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선생’이었다.

그러나 고봉의 서글픔은 이별이 주는 안타까움만은 아니었다. 연로한 퇴계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약 없음에 대한 애달픔만도 아니었다.

퇴계의 떠남은 어지러운 현실정치의 와중에서 믿고 의지한 선생을 떠나보내는 것이었고, 함께 ‘성리학적 진리’를 추진할 ‘동지’이자 ‘정신적 지주’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하니 불순한 시대의 우울과 별리의 안타까움은 고봉에게 증폭된 슬픔으로 각인되었다.

1570년 2월, 고봉의 떠남

1570년 2월, 마흔네 살의 고봉은 서울을 떠나 고향 광주로 낙향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함께 했던 벗들은 고봉을 전송하기 위해 한강가로 나섰다. 고봉은 김계, 김취려 등 벗들과 동호에서 하룻밤 유숙하면서 회한에 젖었다.

일 년 전 퇴계와 이별하였던 한강가의 그 자리에서 고봉은 자신의 떠남과 조우한 것이다. 고봉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월은 유유히 물처럼 흐르는데

천기도 이와 같아 멈추질 않는구려

지난해 작별하며 가슴 아파하던 곳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

고봉은 아무런 말 없이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그와 같이 흘러가는 물의 시간’은 잠시도 멈춤이 없다.

저문 강가에 서서 바라보는 오늘의 물빛은 지난해 바로 이곳에서 떠나보냈던 누군가를 환기하게 만든다. 다름 아닌 퇴계와의 작별이다.

물빛 어린 기억의 시간은 그래서 한층 먹먹하다. 만남이 속절없는 이별을 예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떠남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했다. 고봉이 벗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던 그곳은 바로 ‘지난해(1569년) 작별하며 가슴 아파하던 곳’이었다.

1558년 11월, 고봉과 퇴계의 첫 만남, 이후

1558년 11월, 32세의 고봉은 서울에 와 있던 58세의 퇴계를 만났다. 11월 2일, 문과 급제자 방방 이후 고봉은 일련의 축하 행사를 마치고 귀영(歸榮) 날짜를 잡던 중 서소문에 있는 퇴계의 집을 예방했다.

퇴계는 1558년 11월 초, 고봉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했는데 어제 찾아 주어 만나고 싶은 소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몹시 고맙기도 하고 매우 부끄럽기도 하여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일 남행은 결정하셨습니까? 겨울철에 먼 길을 떠나는 데는 몸조심이 상책입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대업을 궁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라고 적었다.

1558년 11월의 짧은 첫 만남 이후 고봉은 1559년 1월 5일에 작성한 퇴계의 편지를 받았다. 이후 고봉은 1559년 3월 5일에 작성한 첫 편지를 퇴계에게 보냈다.

“... 연전에 다행히 문하를 방문하여 서론을 듣고는 개발된 것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는 바로 제가 평생 깊이 의심해왔습니다.(平生深疑) 그러나 저의 식견이 아직도 분명치 못하고 어렴풋한데, 어찌 감히 망령된 말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선생께서 고치신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 보니 의심이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는 먼저 리와 기에 대해서 분명히 안 뒤에야 심성정의 뜻이 모두 낙착되는 곳이 있어서 사단칠정도 분별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조광조를 기리는 전남 화순 죽수서원 내삼문인 조단문(照丹門).
퇴계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낸 1559년 3월 5일에 고봉은 호남에 머물고 있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의 문제에 대해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논제에 대해서는 그래도 “평생 깊이 의심(平生深疑)해 왔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자부하였다. 33살의 청년은 59세의 노장에게 ‘평생심의’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학술적 자긍심이 강했다.

이렇게 서울 서소문에 있던 퇴계의 집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허여하는 사이가 되었던 이들의 교유는 말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들의 관계는 ‘도우(道友)’와 같은 신뢰의 만남이었다.

고봉과 퇴계는 정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봉은 집지(執贄)의 예는 갖추지 않았지만, 퇴계에게 학문과 삶의 도리에 대해서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고봉은 자신을 ‘후학(後學)’이라고 칭하면서 퇴계를 ‘선생(先生)’이라 불렀다.

퇴계는 스물여섯 살 아래의 고봉을 깍듯이 예우하면서 ‘공(公)’이란 호칭을 썼다. 때론 ‘오우(吾友)’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정식으로 ‘스승-제자’를 인증하는 절차 없이도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허물없이 대했다.

이와 같은 고봉과 퇴계의 사귐은 ‘고봉집’의 ‘양선생왕복서’에 잘 나타나 있다. 퇴계에게 있어 고봉은 학술과 도리를 나눌 수 있는 ‘제자가 아닌 벗과 같은 존재’였고, 고봉에게 있어 퇴계는 사사로운 일상을 공유하면서 깨우침을 주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선생 같은 존재’였다. 학문하는 사람이 갖는 상호 존중과 인간적 신뢰가 나이를 뛰어넘는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1571년 3월, 퇴계와의 영원한 이별

1569년 봄날, 한강에서의 작별 이후 퇴계는 1570년 12월에 작고했다. 이듬해 1571년 3월 13일, 고봉은 문인들과 함께 광주 읍성에서 동쪽으로 십 리 거리에 있는 서석산에 올랐다. 서석산 정상 부근의 규봉에 있는 문수암에 유숙한 후, 3월 21일에는 전(奠)을 올리고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며 ‘감음(感吟)’이란 시 한 수를 읊었다.

선생은 세상 싫어 백운향 가셨는데

천한 이 몸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멀리 생각하니 오늘 가성에 묻히시어

사산의 궂은 안개 점점 망망하리라

3월 21일은 경상도 예안에서는 퇴계의 장례가 치러졌다. 예안의 건지산언덕에 퇴계의 유택(幽宅)이 마련되었다. 원근의 사대부와 유생 300여 명이 참석하고 국장의 예를 갖추어 엄수되었다.

이날 고봉은 퇴계 영전에 직접 조문하지 못했다.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고봉은 문인들과 서석산 규봉에 올라 퇴계를 떠나보냈다.

전라도 광주 출신의 고봉과 경상도 예안 출신의 퇴계는 26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1550년대 말부터 1570년대 초반까지 교유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낯선 삶의 방식’을 직조했다. 이들은 내밀한 사적인 감정과 사유를 표출하면서도 타자의 시선을 의식했고 공적인 관계성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고려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과 상호 교섭은 그 자체가 인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공감의 영역 ‘공감장’이자, 삶의 역사였고, 그들의 인생이었다.

<김경호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광주일보 2022년 09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