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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고려 예종의 통치일상에서 ‘감성’ 지점과 그 함의

작성 : dang32g / 2010-03-29 00:49 (수정일: 2018-01-19 13:48)

(4차 세미나)

고려 예종의 통치일상에서 ‘감성’ 지점과 그 함의

 

김병인(전남대학교 사학과)

 

 

 

<목차>

 

Ⅰ. 왜 예종인가?

Ⅱ. 예종의 통치일상과 그 맥락

Ⅲ. 예종의 왕권강화와 ‘감성’ 정치

Ⅳ. 맺음말

 

 

Ⅰ. 왜 예종인가?

 

고려의 열 여섯 번째 국왕인 예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여진과의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이로 인해 백성의 유망이 계속되어 지방은 ‘十室九空’의 피폐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료들은 大體를 잃고 謀利害民에 앞장섰다. 이에 예종은 在位 17년 동안 고려사회에 대한 개혁에 몰두했다. 부왕인 숙종의 도움으로 詹事府 확충을 통해 세자의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던 예종은 부왕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추진하였는 바, 그 구체적인 정책은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외척세력과 고급관료들의 힘을 억제하고자 숙종대부터 시행된 별무반설치와 대북강경정책 및 주전정책에 대해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시행을 다짐하였다. 둘째,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국학을 진흥시키고자 하였다. 셋째, 지리도참사상을 이용하여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도교를 진흥시켰다. 넷째, 문벌귀족과 연결된 교종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선종의 부흥에 힘썼으며 居士佛敎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다섯째, 송나라 황제와의 친교를 통하여 왕실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그런데 예종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인종대에 이자겸의 난과 묘청 난이 발발했으며, 다음 국왕인 의종대에는 무신난이 일어났다. 예종의 개혁정치는 왜 실패로 끝나게 되었을까? 예종대 개혁정치의 한계는 서로 모순되는 두 세력의 존립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 예종은 개혁을 위하여 한안인세력을, 그리고 안정된 왕권의 유지와 세습을 위하여 이자겸세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추진과 권력의 유지는 결국 불협화음을 드러냈으며, 개혁정치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예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떠할까?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는 “睿宗은 천성이 명철하여 일찍이 東宮에 있을 때에도 어진 선비를 예로 대접하며 효도하고 공손함이 독실하였다. 즉위하여서는 밤낮으로 염려하고 부지런하여서 정신을 가다듬어 좋은 정치를 하려 하였다. 다만 국경을 개척하는 데에 뜻을 두어 변경의 공을 요행으로 여겨 분쟁이 계속되었으며, 華風을 歆慕하고 胡宗旦을 신용하여 그의 말에 너무 혹해서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군사 쓰는 일이 어려운 것을 알고 원망을 버리고 수호하여 이웃 나라로 하여금 감동하고 사모하여 와서 복종하게 하였으며, 홀아비와 과부를 구휼하고, 노인을 부양하며, 學校를 개설하여 生員을 양성하고, 淸燕閣과 寶文閣을 설치하여 날마다 문신들과 더불어 六經을 강론하고, 전쟁을 끝내고 문치를 닦아 禮樂으로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다”고 기록해두었다. 예종은 긍정과 부정의 평가 속에 혼재되어 있다. 그 이면에는 정치세력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후대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바라본 예종대 정치상황에 대한 역사서술은 어떠한 경향을 지니고 있을까? 박용운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은 부왕의 새 정책들을 그대로 계승해가고자 하였다. (중략) 예종은 반대론자의 견해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화폐유통과 여진 정벌 등 중요한 정책들을 굽힘없이 펴나갔다. (중략) 요컨대 숙종대와 예종조의 12세기 초반기는 고려전기의 문벌귀족사회에서 왕권의 강화를 기저로 하는 새로운 혁신이 기도된 시기라는 점에서 유의할 만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박종기는 “숙종대와 예종대 전반기는 국왕권의 강조, 그 위에서 기존의 권귀세력을 억누르고 民에 대한 국가의 직접지배를 통하여 당시 창출된 사회적 부를 국가질서 속에 수렴시키는 방향으로 정치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지배세력인 권귀층의 정치 경제적인 기반을 뒤흔드는, 당시에는 ‘신법’으로 표현되는 형식의 개혁이었다. 예종대 후반기 이후에는 국왕권이 왕실을 보위하기 위하여 기존의 지배세력과 타협하면서 그것을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예종대 후반기 이후 지배세력의 보수화, 파당화 경향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들 견해를 종합하여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종은 개혁을 꿈꿨지만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ࡔ高麗史ࡕ와 ࡔ高麗史節要ࡕ에 실린 예종대 17년 동안의 사료를 들춰보며 그의 통치일상에서 몇 가지 뚜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종의 17년 통치에 있어서 대략 여섯 가지 정도의 정형화된 통치양상을 포착한 것이다. 아울러 그 통치형태는 앞서 설명한 예종 개혁정치의 성패 시점과 맞닿아 있었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전형적인 유교적 통치행위라는 한 측면과 일탈적인 반유교적 혹은 비유교적 통치행위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후자의 통치행위들은 거의 ‘감성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예종의 17년 통치에 있어서 ‘감성지점’은 어느 곳이며, 그 행위들은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우선 예종대 통치일상의 다양한 형태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 유형이 예종대 개혁정치의 성패와 어떠한 상관성을 갖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는 예종의 통치 기간 중 국왕과 신료의 갈등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예종이 어떠한 방식으로 신료들의 비판과 반대에 맞섰으며 이로써 어떻게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는지 드러내보이고자 하는데, 여기에서 예종 특유의 ‘감성정치’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韓國史上에 있어서 ‘감성’의 지형이 어떻게 포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넓혀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