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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권 시대 횡단적 보편학으로서 감성인문학: 장소‧매체‧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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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근대계몽기 시가담론에서 감정문제

작성 : dang32g / 2010-03-29 01:01 (수정일: 2018-01-19 13:51)

(8차 세미나)

근대계몽기 시가담론에서 감정문제

-1910년대 전후 신문 ․ 잡지를 중심으로-

 

국 윤 주(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원, 박사과정)

 

 

목 차

 

1. 문제 제기

2. ‘感情 陶融’의 효용론적 시가인식

3. 애국적 감정의 결집을 위한 개량과 배제

4. 1910년대 감정의 재구성

5. 남은 과제

 

 

1. 문제 제기

 

1904년 러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일본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하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상실하고 식민지화의 과정에 들어서서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한다. 통감부 체제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간을 《대한매일신보》는 창간에서 폐간까지 함께하면서 일제의 식민지화 전략에 맞서 일제와 통감부, 통감부에 협력하는 조정 대신들, 일진회와 같은 무리들을 격렬한 어조로 성토하고 비판한다. 한편 1908.11.29.《대한매일신보》는 1면에 ‘조(詞藻)’란을 마련하고 <自强力>이라는 시조를 게재한다. 이른바 신문시조의 출현이다. 신문이라는 대중 매체에 처음 시조가 게재된 이후 2년여 동안 모두 389수가 집중적으로 실리게 된다. 이것은 유래가 없는 일로 시조 향유 관습에서는 특이한 일이다. 가집, 가곡집이나 시조선집 등이 이 시기에도 꾸준히 출판 보급되는데, 이런 방식과는 다르게 비록 필명이거나 익명이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새롭게 창작된 시조 작품이 일간지 1면 고정란에 꾸준히 게재되어 대중들과 활자로 만나게 된 것이다. 1909년 6월 창간된《대한민보》도 창간호에서부터 삽화, 소설과 함께 歌謠란을 1면에 고정 배치하여 1910년 8월 31일 폐간에 이를 때까지 287수의 시조를 게재하였다. 600수가 넘는 양적인 면에서도 특기할 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이른바 신문시조가 담아내고 있는 의식적 양상이 시국상황을 반영한 정치·시사적인 내용이 압도적이라는 데에서 시조사적 맥락에서도 의미가 있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시조는 낯선 매체를 통해서 호명되어 불꽃처럼 강렬히 피어오르다 사그라들고 만 것인가? 시조 장르의 어떤 요소가 활자 대중매체인 신문의 1면에 자리잡게 만들고 낯선 장르적 실험을 추동하게 한 것인가? 시조의 짧은 시형과 메시지 전달의 유용성, 우리말 시가로써 구술적 속성 등을 사유로 가설·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신문시조의 등장이 대중 계몽을 위해 의도된 기획과정의 산물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선행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는 ‘흥타령 시조’는 신문 편집진이 대중적 인기가 있는 통속민요 흥타령을 활용하여 사설을 개작하고 가사 등 다양한 양식으로의 변용을 실험하는 과정을 거쳐 가장 적합한 ‘흥타령 시조’로 양식화하고 그에 맞춰 집중적으로 창작·수록하게 된 치밀한 기획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시가를 통한 계몽효과의 극대화를 기대하는 가운데 시가 담론에서 감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본고는 당시 신문 잡지에 발표된 시가담론을 면밀히 고찰하여 대중계몽의 기획의도를 파악하고 시가담론이 감정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고 있는지를 살핌으로써 근대계몽기 시가담론의 특질과 그 문학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