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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호남 상징으로서 義鄕論의 전개와 추이

작성 : dang32g / 2010-03-29 01:04 (수정일: 2018-01-19 13:52)

(8차 세미나)

호남 상징으로서 義鄕論의 전개와 추이

 

조상현(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원, 박사과정)

 

 

목 차

 

Ⅰ. 머리말

Ⅱ. 호남의 상징 이미지와 대표 감성

Ⅲ. ‘의향’으로의 상징화 과정

Ⅳ. 맺음말 - 호남 감성과 의향론의 융화

 

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湖南하면 義鄕․藝鄕․味鄕 등 3鄕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호남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타 지역민들도 이제 자연스레 호남을 3향이라 이야기한다. 3향 이미지는 명실 공히 호남을 상징하는 대표 브랜드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듯하다. 최근 들어 문화관광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면서 호남의 각 자치단체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각종 축제나 행사, 문화상품을 개발하는데 열중하는 듯하다. 광주․전남의 연혁과 문화관광 자료에는 빠지지 않고 3향을 언급하고 있으며, 광주광역시의 경우 캐릭터 자체를 ‘아름이(예향)․의롬이(의향)․맛이(미향)’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 이미지로서 3향이 적극 활용되고 있지만, 언제부터 호남이 3향의 고장으로 불리게 됐으며, 또 그렇게 불리게 된 과정에 대한 답을 찾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본고의 주된 관심 대상인 ‘의향’만 해도 마찬가지이다. 왜 호남이 의향인지 물으면 돌아오는 답의 대부분은 필시 백제시대 이래로 예전부터 절의의 정신이 있어 그렇게 불려왔다고 하거나,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호남인들이 그 정신을 현대까지 계승․발전시켰기 때문에 의향이라 불린다는 식이다. 수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학 정신이, 심지어 백제 정신이 호남사람들의 기억 속에 집적되어 있어 하나의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였다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필자는 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現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백여 년 전의 사건들이 ‘집단 기억’으로 형성될 수 있는지, 그 기억이 지역민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다. 또한 지역만의 특성이라고 규정한 것이 진정 ‘호남 지역’만의 정체성인지, 아니면 전 지역에 걸친 계층․신분의 차이에 의한 표출인지 규명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의’가 호남지역에서만 발현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한민족의 보편적 심성으로 이해하려는 김동수의 견해는 주의 깊게 새겨들을 만하다.

‘의향’의 발생에 대한 답을 구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호남을 상징화하려는 작업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보자.

호남이라는 지역을 하나로 묶으려는 작업, 소위 일종의 이미지 창출 작업은 호남학 연구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남학에 대한 원론적인 관심은 1960년대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논의가 시작된 배경에는 전라도 비하, 전라도 푸대접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발들은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대신 지역 내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자는 움직임이 싹트게 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호남학’과 ‘호남문화론’에 대한 논의였다. 학계에서는 1963년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전남대학교 내에 호남지방의 문화를 주 연구대상으로 하는 호남문화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호남문화에 대한 연구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후 학교에 몸담고 있는 전문연구자들의 움직임과 별도로 일반인들의 향토사에 대한 연구도 태동하게 되는데, 향토사․지방사 연구에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단체로 1972년 창립된 장성의 ‘향토문화개발협의회(이하 향문회)’롤 꼽을 수 있다.

1960~70년대부터 시작된 호남지역의 학술 연구를 통해 소위 호남학에 대한 권위가 점차 획득되어지기 시작하면서, 호남에 대한 여러 표상들은 ‘하나의 체계적인 관념군’인 ‘호남 문화론’으로 형성되었다. 즉, 호남문화론은 호남 외부 지역의 대중적 편견에 대한 최초의 대응 가운데 하나였다.

호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호남학 논의는 곧 이어 ‘호남 예향론’으로 전개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호남을 지칭하는 상징으로 ‘예향’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이 호남만의 특징이라 주장하기에 설득력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사람들이 좀 더 예향 됨을 밝혔던 것은 ‘덜 개발되고’, ‘덜 근대화된’ 지역에서 내세울 것이란 예술 밖에 없다는 슬픈 자존심이었다는 자기고백도 있었다.

이 지역의 자본가, 상공인, 성장론자들을 비롯한 일부 엘리트들은 호남지역에 기업유치 활동이 미진한 이유로 非경제적인 요소, 즉 지역의 강성 이미지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1982년 12월 ‘전남지역개발협의회’(이후 지개협)을 결성하여 호남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힘을 쏟았다. 지개협은 기존 호남문화론에서 저항성을 삭제하고 ‘한의 예술적 승화’라는 소극적인 모습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론의 일환으로 당시 광주일보사에서는 ࡔ월간 예향ࡕ, 지개협에서는 ࡔ전남개발ࡕ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지면을 통한 예향론 유포와 지역 상징화 작업을 해 나간다. 물론 호남이 예술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겠지만, 하나의 상징으로서 예향을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는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면도 엄연히 존재하였다.

결국 호남 예향 만들기는 비록 소극적이고 자조적이나마 지역 주민들을 ‘운명공동체’로 묶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으며, ‘이 지역 주민에 의한’ 최초의 학문적인 논의이자 ‘진지한’ 반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역 내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다. 정치․경제적인 패배감을 ‘예향’이라는 이름으로 위안 삼으려는 인식과 이를 강요하는 주변의 눈총에 광주 지식인은 불편함을 표출하고, 예향 만들기가 경제적 낙후 도시를 감추려는 것 이외에 5․18의 진실을 호도하려는 의도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광주가 마치 집단최면에 걸려 예향이라는 환각에 빠져 있다고 일갈하고 있다.

호남문화론에서부터 시작된 예향론은 호남을 하나로 묶는 상징 이미지 작업이라는 점에서 필자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즉 의향 역시 상징화 과정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는가하는 의문을 던져 준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호남이 근래 들어 의향으로 ‘만들어지고 상징성을 부여받았다’는 입장에 서서 그 과정을 추적해 보려 한다. 현재 호남을 규정하는 이미지들이 전근대 사회의 역사에서부터 누층적으로 전승된 것이라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근현대에 들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측면에서 호남의 각종 상징 이미지와 의향론을 바라보려는 것이다. 다만 필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호남의 의향 됨’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호남이 의향화 되어가는 과정을 찾기에 앞서 먼저 현재 義를 대표로 내세울 만한 호남의 감성적 요소들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검토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근래에 호남을 상징하는 문화자원을 여러 단체에서 선정하였는바, 이를 통해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호남의 대표 감성을 추출해 보는 작업을 시도해 보려한다. 호남의 문화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호남문화론’이나 ‘남도문화론’ 등으로 언급된 적이 있지만, 호남의 감성과 이미지와의 연계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검토된 바 없다.

호남의 대표 문화원형에 스며들어 있는 감성 요소 검토 후, 이것이 의향 관련 논의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련의 작업에는 신문, 잡지 등 당대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주로 참고 될 것이며, 시대별 흐름에 주목하여 호남이 의향으로 상징화되어가는 과정과 그 계기를 도출해 볼 것이다.

호남 특히 광주의 경우 한국의 도시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도시이자, ‘민주화의 성지’․‘예향’․‘의향’ 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상징정치의 주요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는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또한 향후 호남의 감성과 의향론이 어떤 식으로 융화되어가야 할지에 대한 제언의 역할도 겸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