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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1980년대 영국의 ‘흑인 영화 르네상스’

작성 : dang32g / 2010-03-29 01:36 (수정일: 2018-01-19 13:58)

(12차 세미나)

1980년대 영국의 ‘흑인 영화 르네상스’: 소수인종의 정체성 찾기와 소외의 극복

 

I. 머리말

II. 흑인 영화 운동 발생의 배경

III. 흑인 영화 공동체의 목적

IV. 대표작들의 정체성 추구

V. 맺음말

 

 

I. 머리말

 

역사적으로 다수의 사회적 소수자들은 제대로 된 자기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한 현상은 당대의 사회 지배층이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정당화하고 존속시킬 여러 제도적·문화적·심리적 기제를 만들려고 시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의 하나는 사회적 강자들이 자기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계층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그 원인과 책임이 있다는, 이른바 ‘희생자에게 책임 돌리기(blaming the victim)’의 방법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특권적 지위를 정당화하여 그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매커니즘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강자들에 의해 약자들에게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는 그 실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정체성이 되었고 그들을 소외(疎外)시킨 주된 요인이 되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러한 사례를 자주 목격한다.

특히 근·현대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낳은 빈민과 소수인종은 소외를 겪고 있는 대표적 집단들이다. 자본가와 제국주의자들은 종교·학문·문화·언론 등을 통해 빈민과 소수인종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근대 초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부터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한 빈민은, 20세기 후반에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의해 미국과 영국에서 ‘하위계급’이란 이름의 빈민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그러한 덧씌우기는 예외가 아니게 적용되었다. 특히 20세기 중반부터 이민을 온 소수인종이 겪은 내용도 그 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소수인종 - 특히 1940년대 말부터 영국으로 이주해 온 집단 - 에 대한 백인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우선 인종적 편견이 덜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백인은 소수인종이 영국 사회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실제로 소수인종은 영국의 문화와 예술의 발전과, 청년문화 등 하위문화(subcultures)를 풍부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문학에서 1970년대 이후 중남미, 아시아와 아프리카 이민의 후손에 의한 ‘식민지의 외침’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음악을 통해 영국의 대중문화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아프리카-카리브계 이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인종의 재능을 제대로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적 기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영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압도적 다수의 영국인은 소수인종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거리를 배회하는 흑인 청년들의 이미지는 바로 폭력·절도·강간 등을 일삼는 범법자 무리의 그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소수인종에 대한 영국인의 인식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국인들의 인종주의(racism)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인종주의 논의에 따르면 영국의 인종주의는 ‘내재적 인종주의’(intrinsic racism), ‘제도적 인종주의’(institutional racism), 문화적 인종주의(cultural racism), 상징적 인종주의(symbolic racism) 등의 특징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영국의 인종문제는 인종주의의 여러 국면이 중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이러한 인종주의가 오늘날까지도 위세를 떨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양산하고 지속시키는 매카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영국의 인종주의는 경찰·주류 언론·문화계가 왜곡하고 확산시키는 소수인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종주의는 소수인종을 영국사회의 주변인으로 소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다.

소수인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비단 소수인종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흑백 인종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공존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소수인종은 백인의 차별과 박해, 그리고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불의에 맞서 거리와 문화의 공간에서 투쟁했다. 소수인종 문제는 1919년 리버풀에서 반(反)유색인종 폭동이 발생하면서 영국 사회의 관심사로 등장한 이후, 1958년 노팅 힐(Notting Hill)과 노팅엄(Nottingham)에서 또 다른 인종 폭동이 발생하면서 “영국 현대사의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특히 80년대로 들어오면서 인종폭동은 그 발생 빈도도 잦고, 시위의 강도도 이전의 것들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1981년과 1985년의 런던, 브리스톨, 버밍엄, 그리고 리버풀에서 연달아 폭동이 발생하면서 소수인종 문제는 20세기 영국의 주요한 정치·사회 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한 지위를 보장하려는 노력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즉, 의회의 입법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는 개혁적 자유주의 노선과, 거리에서 물리적 시위를 하거나 문화운동을 통해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의 활동은 1966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의회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들(Race Relations Acts)을 만드는 큰 가시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반면, 의회 외부에서 이루어진 소수인종의 시위나 문화적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추구하고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1970년대의 래스터패리 운동(The Rastafarian Movement) 등 소수인종의 운동에 관한 것도 그렇고, 1980년대의 인종문제와 관련한 사회운동들 역시, 길로이(Paul Gilroy)의 지적처럼,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거의 인정받지 못한 채” 지나갔기 때문이다. 소수인종의 사회 운동에 관한 최근의 연구동향도 반(反)인종주의와 소수인종 공동체의 활동을 다루면서도 그 내용은 고작 운동의 범주의 문제나 이론적 측면에 머물렀다. 영국과 유럽의 ‘인종’을 둘러싼 사회운동에 관한 분석과 경험적 자료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활발하지는 못했다.

소수인종은 70년대부터 자신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소외되어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시위와 래스터패리 운동(Rastafarian Movement)과 같은 문화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올바른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에 발생한 ‘흑인 영화 르네상스’(Black Film Renaissance) 운동은 주목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운동은 소수인종 영화 예술가들이 영화를 통해 백인 기득권층이 소수인종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온 잘못된 관행을 고발하고 자신들의 올바른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었다. 1980년대 영국 영화가 번성기를 맞이하면서 그 르네상스의 한 축을 차지했던 이 운동은 문화영역에서 벌어진 소수인종 운동에 관한 한 중요한 한 사례를 제공한다.

본고에서는 소수인종의 인종의식이 출현한 배경, 흑인 영화 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기반, 흑인 영화 운동가들이 추구한 목표, 그 운동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보여주는 소외 극복과 정체성 찾기의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