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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권 시대 횡단적 보편학으로서 감성인문학: 장소‧매체‧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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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문화대혁명의 감성적 기원

작성 : baluni / 2010-11-15 11:29 (수정일: 2018-01-19 14:03)

 [24차 세미나]

문화대혁명의 감성적 기원 

김창규 

Ⅰ. 머리말 

Ⅱ. ‘위대하신 분’의 불안

Ⅲ. 邪氣의 유발과 홍위병의 등장

Ⅳ. 광란과 야만의 문화대혁명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966년 중국공산당 주석 모택동은 수정주의적 당국자, 즉 모택동이 만족할 만큼 혁명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유소기, 등소평 등의 당 지도자들과 맞서 싸우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다. 모택동의 소집에 호응한 홍위병들은 중국의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하고 정부 내의 부르주아적 요소로 간주되는 모든 것을 축출하는 데 앞장서는 새로운 혁명가인 듯 스스로 도취되었다.

모택동이 처음으로 백만 홍위병을 만난 8월 18일, 임표는 자본주의를 달리는 당권파의 타도, 자산계급 반동권위 인물의 타도, 자산계급의 모든 보황파들의 타도, 혁명을 압제하는 형형색색의 행위타도, 모든 귀신잡귀들의 타도를 외쳤다. 이에 고무된 수백만의 홍위병 철부지들이 광란하였다. 이들은 거리의 이름을 갈아치우고 절간을 부숴대고 전통 연극의 복장들을 불태우며, 권위인물들을 일거에 때려눕혔다. 교장선생님을 타도하고 스승을 비판하였다. 반동인물들로 지목된 집안들을 뒤집으며, 집안의 개와 닭들조차 평안할 수 없도록 난동을 부려 사회는 온통 대혼란에 빠졌다.1)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면서 서로의 양심과 영혼을 할퀴고 갉아먹었다. 이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누구라도 거기에 걸려들면 귀신이라도 들린 듯 변해버렸다. 화목하며 단란하던 가정도 둘로 나뉘고, 부부가 이혼하고 부모 자식은 물론 형과 아우도 반목하는 불행이 닥쳐왔다.2) 10년 동란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이제까지의 연구는, 대내적으로는 모택동이 잃었던 권력을 탈취하려는 시도가 문혁이라는 시각에서, 정치 사상개혁 혹 모택동과 실무파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라고 이해하여 왔다. 대외적으로는 중소관계의 악화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으로 인한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그 돌파구로써 문혁의 발동을 설명하기도 한다.3) 문혁의 성과에 대한 평가에서도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이 교차한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