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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서양의 감성 인식의 지적 전통

작성 : dang32g / 2010-03-29 00:43

 

 (1차 세미나)

서양의 감성 인식의 지적 전통

 

박우룡(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교수)

 

           <목차>

 

Ⅰ. 서양의 감성 표현의 역사

Ⅱ. 감성 인식의 전통

Ⅲ. 유럽 대륙의 전통

Ⅳ. 영미의 감성 분석

 

 

Ⅰ. 서양의 감성 표현의 역사

 

서양의 역사에서 이성과 감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소한 서로 균형을 이루어왔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전통사회에서는 그 동기가 권력의 유지와 확장을 위한 선전술이건, 종교 전도와 보편교회의 유지를 위한 시각 이미지의 강화이건, 부유층의 과시욕이건, 순수 예술적 취향이건 간에 문화와 예술을 통한 감성적 요소가 이성적 요소를 압도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 문명, 중세의 기독교 문명, 근대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문명은 모두 그 시대의 감성을 반영한 훌륭한 문화유산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폴론적’ 인간과 ‘디오니소스적’ 인간형의 공존, 연극과 예술에서 경쟁심의 강조, 고대 로마에서 키케로 같은 웅변가들이 지성과 감성을 동시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에서 그 균형 잡힌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또 심지어 공화정 후기 술라와 같은 로마의 군인 정복자들에서부터 네로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지도층은 그리스의 문화유산을 로마로 가져와 그리스 문화의 모방(미메시스의 시작)을 통해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전 로마사회가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회적 풍조로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의 시각 이미지를 통한 종교적 감성의 발전은 서양의 중세가 찬란한 문화의 보고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특히 12세기 중세 성기부터 가톨릭교회의 영적 성숙은 다시 여성원리를 종교의 테두리 안으로 수용하여 인간의 구원의 요청을 하느님께 전달하는 존재로서의 성모 마리아의 존재가 중시되고 마리아에 대한 숭배가 본격화되면서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중세의 문학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감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더욱이, 13세기 성 프란체스코가 민중을 위한 종교를 표방하고 종교의 시각 이미지가 보통 사람의 ‘공감(sympathy)’을 얻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서양의 종교 미술과 예술 전반에 감성적 요소가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르네상스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성과 감성의 두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6-17세기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상업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과학혁명이 발생하고 절대왕정이 강력한 권력을 구가하게 되면서 식민지시대가 열리고 최초의 세계적 예술 장르로 확산되어나갔던 바로크 예술은 종교와 세속의 전 영역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장르에 걸친 문화예술의 발전을 보이면서 서구인의 감성 해방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의 조화와 균형은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마치 양날의 칼처럼 한편으로는 종교적 광신과 미신, 그리고 무지를 밀어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획일화된 이성적 질서를 강요함으로써 인류에게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핵심인 합리주의가 지나치게 원자화된 개인과 이성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편협성’(J.S. Mill)을 보이고, 이성이 발견한 자연법적 질서에 입각하여 세상을 급진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시도는 프랑스 혁명의 파괴적 측면에서 그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성과 과학주의만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그 방향과 질서를 제시해 줄 것이라는 계몽주의의 이성중심적 사고는 인간의 감성적 요소를 미신과 무지의 차원으로 몰아 깡그리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새롭게 개화한 낭만주의 운동(Romantist Movement)은 인간 감정의 해방과 개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표현을 주장하면서 계몽주의에 도전하였다. 이 운동은 “18세기 합리주의의 편협성에 대한 반발”(J.S. Mill),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생겨났다. 낭만주의자들은 18세기의 합리주의로부터 탈피하여, 감정, 상상력, 직관 등 인간행동의 비합리적 요소를 인식하고 그것에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낭만적 반동). 비록 처음에는 문학과 예술운동으로 출발했지만 낭만주의는 역시 철학과 정치사상, 각별히 보수주의와 민족주의에 침투하였다.

19세기 초 유럽 문화계의 지도적 인물들 대부분이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문필가들로는 영국의 시인 셸리, 워즈워스, 키츠, 코울리지, 바이런,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 위고와 가톨릭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샤토브리앙, 독일의 소설가들인 쉴레겔(A.W. and Friedrich Schlegel) 극작가이자 시인인 쉴러, 철학자 셸링이 있다. 미술에서 독일의 프리드리히(Caspar P. Friedrich)와 영국의 컨스터블(John Constable) 미술로 낭만적 분위기를 표현하였고, 후기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그리고 바그너가 음악으로 그것을 표현하였다.

낭만주의의 핵심적 메시지는 개인의 상상력이 예술 창조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것은 중세 기독교의 내세 지향성에 대한 반발이었던 계몽사상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이성을 위축시키고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신앙을 공격하였다.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을 억누르고 창조성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계몽사상가들의 과학적 합리주의를 비난하였다.

계몽사상가들처럼, 낭만주의자들도 개인의 인격의 중요성을 믿었다. 실로, 낭만주의자들이 계몽사상가들을 비판하도록 만든 것은 그들이 개인에게 부여한 바로 이러한 높은 가치였다. 그들은 계몽사상가들이 활력을 가진 인간을 영혼 없는 사고하는 기계로 변화시키려고 한 것을 비난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은, 모든 생명을 기계적 구조에 꼭 들어맞도록 하려는 계몽주의의 기하학적 정신이 개인들을 위축시키고 열등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천박한 사고는 인간들을 그들의 감정으로부터 분리시켰고, 자발성과 개별성을 파괴하고, 창조적 상상력을 질식시키고, 그들의 인간적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계몽사상가들이 강조하는 이성의 지배는 개인을 감정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인간적 본질을 깨닫지 못하도록 만들고,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며, 의지를 마비시켰다.

『파우스트Faust』에서 괴테(J.W. von Goethe)는 그의 과학과 철학의 추구가 그를 생명의 원천이자 밑바탕인 보다 깊은 지혜로부터 고립시키는 한 인간의 공허함을 묘사하였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식 많은 파우스트 박사(Dr. Faustus)는 이제 감각의 깊이를 측량하기를 원한다. 평온을 거부하고 인생의 경험의 즐거움과 희열에 대한 그의 갈망은 낭만주의자들의 정열의 강도를 실례로 보여주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 파우스트는 경험이 없는 조용하고 명상하는 삶의 공허함을 탄식한다.

- Goethe: "My worthy friend, gray are all theories, /And green alone Life's golden tree."(Faust, pt. 1, sc. 4.)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과다한 지식화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시키려면 감정의 풍요와 적극적 표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문명이 부과한 관습, 가치관, 규범, 기준에 의해 억눌려 온 영혼 속에서 원초적 자유와 창조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루소).

낭만주의자들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만으로는 살 수 없으며, 이성이 가장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시적 상상력으로 자양분이 주어져야 한다. 본능과 상상력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은 실재(reality)를 경험할 수 있으며 그들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이 분석적인 철학자들보다 인생에 대한 훨씬 더 큰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삶의 심원한 신비성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고, 영원한 것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다.

 

- William Blake: “Reasoning Power in Man is an incrustation over my immortal Spirit” (Blake, Milton, 40. 34-35.)

- John Keats: “I am certain of nothing but of the holiness of the Heart's affections and the truth of Imagination,” “O for a Life of Sensations rather than of Thought,”) (H. E. Rollins, ed., The Letters of John Keats, 1: 184-185.)

 

또 낭만주의는 개인의 느낌과 경험을 중시하였다.

- W. Blake: "bathe in the waters of life"(Blake, Milton, , 41. 1)

- J.J. Rousseau: “For us, to exist is to feel and our sensibility is incontestably prior to our reason.” (H. G. Schenk, The Mind of the European Romantics, p.4)

 

특히 계몽사상가들이 자연을 생명이 없는 기계로 보았던 반면, 낭만주의는 자연을 살아서 숨쉬는, 神性으로 가득 찬 곳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에게 자연은 창조적 상상력의 에너지를 길러주며, 인간에게 보다 고매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인식하였다.

 

 

William Wordsworth :" One impulse from a vernal wood

May teach you more of man,

Of moral evil and of good,

Than all the sages can."

(Andrew J. George, ed., The Complete Poetical Works of Wordsworth, p.83의 “Tables Turned,"에서)

그리하여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파괴하는 공장들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공장을 인간의 삶으로부터 즐거움을 빼앗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어두운 악마”(W. Blake)라고 보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국과 미국의 낭만주의는 자연친화적인 감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성의 고양을 추구함으로써 산업화와 물질주의의 이기적 인간형에 대한 이상적인 개인주의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특히 미국형 낭만주의인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이끈 에머슨(Ralph W. Emerson), 소로(Henry D. Thoreau), 그리고 휘트먼(Walt Whitman) 등은 칸트와 워드워스의 입장을 미국에 접목시켜 자연을 통한 인간의 감성과 인간성의 고양을 추구하는 데 앞장섰다. 쿠퍼(J.P. Cooper)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자연친화적인 감성은 이상적 미국인 상의 한 원형이 되었다. 인간의 완전성에 관한 낭만주의와 유니테어리언주의(Unitarianism)의 가르침은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고, 19세기 전반 사회개혁의 정서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남부 전쟁 이후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는 그러한 감성적 개혁주의를 파괴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감성은 20세기 미국의 소설, 음악, 영화의 주요 주제로 다시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