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활동

분권 시대 횡단적 보편학으로서 감성인문학: 장소‧매체‧서사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

세미나

유학적 감성 세계 : 공감

작성 : dang32g / 2010-03-29 00:45

 

 

(3차 세미나)

유학적 감성 세계 : 공감

 

김경호(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교수)

2009년 4월 15일 발제

 

 

 

<목차>

 

1. 유학적인 삶의 세계에서 감성의 문제

2. 유학적 감성 세계의 원형 - 시/악/예

3. 유학적 감성 세계 이해를 위한 두 가지 사례

4. 유학적 감성의 다양한 형태

5. 감성 해명을 위한 조선유학의 논변 - 사단칠정론

6. 왜 감성이어야 하는가

 

 

1. 유학적인 삶의 세계에서 감성의 문제

 

聖스러운 속인俗人’ 공자孔子에 의해 집대성된 유학은 ‘삶의 과정 그 자체’(the process of living itself)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의 주무대는 빈번하게 접촉하는 ‘일상적 삶의 세계’이며,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과 그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공유하는 정감情感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본래적 느낌 속에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공감은 타인에 대한 체험의 형태이기도 하다. 공자의 인仁, 충忠, 서恕, 예禮 등의 개념뿐만 아니라 맹자의 ‘의義’ 또한 이러한 관계와 정감을 바탕으로 성립한 개념들이다. 이렇게 보면 유학적 감성의 세계는 자신의 정감을 어떻게 발산하며, 또 넘치지 않게 조절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의 하는 문제가 관건임을 알 수 있다. 이 정감이란 바로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여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유학적 감성의 세계는 인간의 본성과 마음 그리고 정감의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성을 통해 나 자신을 포함한 ‘세계 이해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 정감을 중시하는 태도는 개인적 가치와 독립성을 중시하는 문화권보다는 타자와의 ‘관계와 접속’을 중시하는 문화권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개인과 개인, 개인의 확장으로서 사회적 관계망을 중요시했던 유학의 전통은 정감적 교류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공감共感’을 중시하게 된다. 유학의 전통이 아직도 일상적 삶의 가치와 규범적 질서 의식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한국은 좋은 사례인데, 한국인의 언어 습관에 이러한 측면이 발견된다.

‘정 든다(들다)’ 혹은 ‘정 떨어진다’라는 말은 공감의 정감적 교류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감성적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 든다’라고 할 때 ‘든다’라는 어휘는 ‘깃든다’의 준말로 사전적으로는 ‘아늑하게 서려들다’라는 의미이다.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잔잔하게 쌓여져서 느껴지는 누적적 감정상태가 ‘정 든’ 상태이다. 이러한 ‘정 듦’의 속성은 당사자들의 의지(intentionality)와 무관하게 일상의 생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정감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정감이 누적되어 ‘하나의 심정적 관계로서의 공감’이 형성됨으로써 관계의 당사자들 사이에는 미묘한 연대감이 형성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일체감’은 서로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정신적․물질적 지원 태도를 갖게 됨은 물론 ‘배타적 일체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낯선 타자에게 불편할 정도로 무뚝뚝하고 배타적으로 보이는 한국인의 습성은 이러한 정감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떠도는 자’에 대한 거부감은 관계를 통한 ‘공감의 틀’이 확보되지 않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정감의 교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낯선 사람과 쉽게 친숙해질 수 없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공감의 틀’이 부재하는 사례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유학의 감성 세계에서는 이 정감의 교류를 일반화하여 ࡔ예기ࡕ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람이 태어나서는 고요하니 이것은 하늘의 성이다. 물에 느끼어(感) 움직임은 성의 욕欲이다. 물이 이르러 지각이 작동한 연후에 호오好惡의 정감이 드러난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유학의 일반화된 정감에 대한 이론이다. 이 입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사물의 세계에 까지 확장하여 파악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즉 사람과 사물이 ‘만남의 접속’을 통해서 일정한 정감이 파생하고 또한 교류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학적 감성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 곧 관계를 통해 정감이 교류되듯이 사람과 사물 또한 만남을 통해서 정감이 일어나고, 타자로서의 외물로부터 얻은 느낌(感)에 대하여 일정한 정감의 대응(應)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타자로서의 외물’에 대해서도 일정한 정감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감성적 인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를 공자는 중히 여긴다.

단적인 실례로 공자는 기수음영(沂水吟詠)하고자 하는 증점을 지목하고 있다. 증점은 “늦은 봄날 봄옷이 마련되면, 벗들과 동자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다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리라”(暮春者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咏而歸)라고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자를 보고서 공자는 “나는 그대(증점)와 같이 하겠노라”(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라고 하여 증점(曾點)의 쇄락한 감성적 세계를 높이 칭찬하고 있다.

유학적 감성 세계에서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의 삶의 제 조건인 환경은 단순한 이해利害 관계를 넘어서 정감적 연대를 이룬다. 곧 ‘공감의 세계’를 형성해 가는 호혜적인 평등의 관계이자 ‘사랑’의 관계이다. 상호 연대를 통해 생명활동이 지속되는 만큼 모든 존재자는 생명성을 공유하는 존재로 파악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년상을 지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공자의 설명은 단지 부모 슬하에 있던 시간과 죽은 부모의 상을 지내는 시간의 길이를 같게 하려는 계산적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던 최소한의 시간(3년) 동안 부모가 내게 기울여준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에 대한 자애의 정감을 전제한다. 나에게 생명과 삶의 터전으로서 문화를 전해 준 부모에 대한 감사와 존경은 그래서 인륜성의 근본인 효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정감은 유학자들이 매우 중시한 감성적 인간의 특질이다. 절개와 지조를 강조하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도 의리를 지향하지만 그들은 또한 예민한 감성에 기초한 인정(人情)의 구현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모든 정치적 행위 또한 인정(人情)에 기반하였고, 그러한 점에서 덕치(德治), 예치(禮治)를 중시하였다. 모든 인간적 행위와 언어활동의 이면에는 정감이 개입한다고 바라보았으며 이성적 합리성만을 중심축으로 고집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기질적 한계를 극복하고 덕성의 가치를 확대하고자 했던 교육에 있어서도 정감의 교육과 의리의 교육은 병행하고자 하였다. 유학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정옥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격물․궁리․치지을 통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명증明澄한 자기 성찰이 가능하여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인간형에 도달한다 하여도 그러한 합리성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 시詩․서書․화畵를 통한 감성훈련을 중요시하였다.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시회詩會를 열고 한시를 지어 글씨로 써서 남기고 그림을 그려 서로 돌아가며 감상하는 등 일련의 예술행위를 통하여 풍부한 정서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메마르기 쉬운 학자생활에 윤기를 더하였던 것이다.…이성과 심성이 잘 조화된 인간형이 선비의 이상형으로 추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추구한 이상적 인간형은 감성의 발현인 인정人情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옳은 도리義理를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었다. 너무 인정에 치우치면 기준이 모호해져 부패하기 쉽고 의리만 따지다 보면 세상살이가 삭막해져 살맛이 안 나기 마련이므로,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부드러우면서도 기준이 있고 따질 일은 분명하게 따지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가진 균형감각이 있는 인간이야말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학의 세계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감적 태도를 바탕으로 이성적 판단을 융합한 균형잡힌 감성적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