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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정율성의 음악관에 투영된 사상적 지향

작성 : dang32g / 2010-03-29 01:09 (수정일: 2018-01-19 13:54)

(9차 세미나)

정율성의 음악관에 투영된 사상적 지향

 

노기욱(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원, 박사과정)

 

목 차

 

1. 머리말

2. 서정음악과 항일지향

3. 군가음악과 혁명지향

4. 맺음말

 

1. 머리말

 

정율성(鄭律成·정뤼청, 1914∼1976)은 중국에서 오늘날 뛰어난 혁명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그의 가족들에 의하여 양림정(楊林町)이 고향이라고 알려지자, 관할 구청인 광주광역시 남구청은 정율성을 주제로 한 ‘동아시아의 예술의 혼’이라는 음악 축제를 개최하였다. 이는 해당 지역과 연관된 인물․사건․공간을 통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율성은 중국에서 풍부한 음악적 감성을 발휘하여 연안송·팔로군대합창 등 400여곡을 작곡하였다. 이러한 작곡활동에 힘입어 중국공산당이 주관한 건국 60주년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인물 100인’에 선정됐다. 그렇지만 이념이 다른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소개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정율성이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 중에 북한군을 지원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율성이 한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글로벌 북방외교에 편승한 것이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양국이 국교를 수립되자 수교 행사에서 정율성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광주광역시 남구청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2004년 6월 11일 제1회 ‘음악가 정율성 기념학술대회’ 추모행사를 시작하였다. 당초 광주 남구청 주최로 열리던 음악제는 지난 2006년부터 규모를 키워 광주광역시 주최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남구청에서는 지속적으로 관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최근 남구 정율성 거리을 조성하고 흉상을 세웠다. 정율성에 관한 연구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ࡔ논정율성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연변대 김성준이 정율성의 작곡 부분과 출생지를 추적하였다. 한국에서는 정율성 음악 작품 장르와 화성에 관한 분석과 사상성을 추적한 글이 발표되었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정율성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中國國民政府軍事委員會幹部訓練班第6隊) 제2기 졸업생으로, 공산주의 사상과 혁명음악을 학습한 인물이라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정율성의 형 정의은(鄭義恩)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정율성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표된 글은 정율성의 음악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글에서 정율성의 행적과 음악관에 대하여 생애사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한다. 검토 방법으로 1914년∼1938년까지 서정음악의 창작을 이루던 전기시기와, 1939년∼1976년까지 군가음악을 작곡하던 후기시기로 나누어, 전·후기 음악관에 투영된 사상적 지향은 어떠했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전기시기 정율성은 왜 중국으로 간 것인지,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간부학교로 불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일제 경찰 자료를 분석하여 밝혀보겠다. 그리고 중국에서 이방인이었던 정율성이 어떤 음악적 감성으로 중국 인민에게 통할 수 있었으며 연안송을 작곡하였는지를 알아보겠다.

둘째, 후기시기 정율성이 계속해서 서정음악을 작곡하지 않고,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불리는 팔로군행진곡 등을 작곡한 군가음악가로 변신하였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작업은 정율성이 군가 음악가가 된 이유를 새롭게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정율성의 행적을 통해 일정 부분 일제식민지하에 호남인의 감성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