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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키움

‘행복’의 개념, ‘행복’의 감성

작성 : baluni / 2010-07-20 17:53 (수정일: 2018-01-19 13:36)
 (9차 콜로키움)

‘행복’의 개념, ‘행복’의 감성

― 1900~10년대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를 중심으로

                                                                                        권 보 드 래 (동국대학교)

1. ‘행복’의 문제성

* ‘행복’이란 논쟁적인 어휘이다. ‘행복eudaimonia/happiness’이라는 개념을 주창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마련한 사상적 전회, ‘행복’이라는 목표에 대한 칸트의 경계나 니체의 혐오, 혹은 실존주의자들의 회의, ‘행복’을 문제 삼음으로써 프랑스혁명을 평가 절하한 아렌트의 문제적 시도 등 사상사에 있어서의 몇 가지 계기만 기억하더라도 ‘행복’이 얼마나 많은 논쟁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예컨대 『실천이성비판』 초두의 정리(2~4)에 있어 칸트는 행복을 ‘실질적 실천 원칙material practical principles’에 할당한다. 무조건적 형식, 즉 정언 법칙인 자유와 달리 행복은 손에 잡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건이다. 칸트는 행복을 “이성적 존재자가 삶의 쾌적함을 인식하는 상태”로 정의하는데, 내부에 오성의, 심지어 이성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행복’이란 필요의 존재being of needs로서의 인간,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전제에 입각해서만 작동하는 가치이다. 그러나 “현존재Dasein에의 만족은 인간이 타고난 성향이 아니”다. 인간은 필요에 속박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야 할 바’에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비로소 실천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 수 있으며 자유일 수 있다.1) 궁극에 가서 ‘자유’와 ‘행복’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칸트에게 있어 ‘행복’은 현저히 정지, 물질성, 현존재에의 만족에 편향되어 있는 가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이데아론에 맞서 ‘행복’이라는 한결 실질적인 목표를 조형하면서 행복을 ‘활동’으로서,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훈련에 의해 획득되는 덕으로서 정의한 바 있었지만, 칸트가 보는 ‘행복’은 한결 수동적이다. ‘행복’을 결국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자신을 불사불멸의 것이 되게 하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도록 온갖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2)는 제안으로 연결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취도 칸트에 있어서는 희미해진 것으로 보인다.

* ‘행복’을 정지, 물질성, 현존재에의 만족 등에, 그러니까 일종 수동적인 개인에 연관시킨 것은 칸트만이 아니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세계사적 개인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쓰며, 보봐르는 『제 2의 성』 서두에서 행복이란 停滯를 장려할 위험이 있는 모호한 개념이라고 규정한다. “터키의 할렘 궁전의 여자들은 선거권을 가진 여자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헤아리기는 전혀 불가능하고,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을 행복하다고 단언하기는 언제나 쉬운 일이다.”3) 행복은 주관적 심리상태에 불과하며, 우연적이고, 따라서 공통의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을 회의하는 이들이 ‘행복’ 대신 추천하는 것은 흔히 ‘자유’이다.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를 향하여 자기 신장을 도모하는 외에는 목전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은 달리 없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기투, 부단한 자기 초월이다. 개인의 수준에서나 국가-민족이나 인류의 수준에서나 목표가 되기 적합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