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인문학센터
[로뎀] 1차(2019.06.10.) :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문학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대화의 가능성
이희경
1차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질문
① 대화를 좋아하시나요? 요즘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② 대화를 나눈 후 공허하다고 느끼거나, 반대로 내 안이 충실해졌다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이런 차이는 어떨 때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나요?
대화, 이야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창구입니다. 이 창구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서로 위로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말과 대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하고 삽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상황들도 적잖이 목격합니다.
로뎀나무 식구들이 관심을 갖는 영역이 대화, 소통 그리고 치유라고 들었습니다. 또한 지역민을 위한 상담자의 역할을 상당 기간 맡아 오셨다고도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이런 실천을 해 오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말, 대화,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깨닫고 경험하신 영역들이 제가 이 자리에서 나누고자 하는 부분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양할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인문마을 프로젝트라는 기회를 빌려 현장에서 대화와 치유를 실천하는 분들을 뵙고 배움으로써, 이제까지 제가 이론과 삶에서 배운 것들에 보태려는 얄팍한 꾀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여러분과 나눌 대화에서 저의 본의는 낱낱이 드러나겠지요. 이 또한 저를 향한 새로운 소통과 치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로뎀나무 식구들께서 추천해주신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는 저자가 고백했듯이 집밥 같은 치유를 지향하는 상비치유지침서입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지는 부분들이 너무 많더군요. 저 자신은 물론, 가족·친구·동료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한 것이 상처를 줬구나.’ 혹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등등, 저의 내면을 전반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 책이었습니다. 이 책과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번 인문마을 강좌 내내 수시로 언급될 것 같습니다. 이 두 권에서 이야기된 인간의 다양하고 깊은 내면세계를 문학 작품을 통해 다시 바라보는 작업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앞으로 서너 차례에 걸쳐 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대화의 목적은 당연히 대화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있겠지요. 타인에 대한 이해일수도, 나에 대한 변호일수도 혹은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화가 이 모든 것들을 이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구성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중국의 문호 루쉰
오늘은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라는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고른 텍스트는 루쉰의 산문집 『들풀(野草)』입니다. 루쉰은 「광인일기」·「아Q정전」과 같은 단편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SNS에서 냉소적으로 사용하는 ‘정신 승리법’은 바로 ‘아Q’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녹록치 않은 세상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비뚤어진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중국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현대소설이라 평가받는 「광인일기」도 무척 재밌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주위 사람들, 가족, 그리고 자신이 ‘사람’을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 ‘미친 자’가 유구한 중국 역사가 온통 ‘식인’의 기록으로 점철되어있음을 발견하고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참된 인간’이 될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끝을 맺는 이 소설은, 어느 사회 혹은 집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물론 루쉰은 이 ‘미친 자’의 깨달음과 실천이 애저녁에 실패하고 말 것임을 소설의 서두에 미리 언급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반 중국의 현실이 ‘인간’의 발견을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중국적 전통과 서구적 가치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봉건 왕조가 공화제로 바뀌며 다시 군벌들이 할거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도 대화의 의미는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들풀』의 서문 격인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대화는 물론 말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듯한 뉘앙스입니다. 실제로 그는 아끼는 후배 작가였던 샤오쥔(蕭軍)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그 『들풀』은 기술적으로는 결코 형편없지 않으나 심정이 너무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건 여러 번 난관에 부딪힌 뒤 썼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검열이나 여러 형태의 비판으로 인해 곧이곧대로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바꾸어 보면 이는 진솔한 대화, 진심어린 자기표현에 대한 열망으로도 읽힙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박식하고 복잡한 사상의 소유자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숱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내면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가 중국과 서구를 단순 대비하여 그 중 나은 것을 취했던 동시대인들과 다른 사상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혹독히 비판했지만, ‘현대’에 대한 그의 회의는 고대에 대한 회의 못지않았습니다. 진화론적 사유 노선에서 중국전통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논할 때는 ‘인도주의적 원칙’을 끌어들여 진화론을 제한하고 부정합니다. 공화정이 조속히 도입되길 기대하고 혁명을 지지했으나, ‘대중정치’와 ‘거대 집단’을 출현시켜 심각한 전제정치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평등의 원칙에 대해 깊은 우려를 품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세우고(立人)’ 과학문명을 존중하며 국민성을 개조하려는 계몽주의자였으면서,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물질적 발전·정치제도·이성의 원칙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인간 개체’에 관심을 갖고 자아와 자아의 관계 속에서 수립되는 비이성주의 체계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좌익문예운동에 참여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문학’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문단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괴리되어 구사회로 되돌아갔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였던 루쉰의 폭넓은 사상적 범주와 깊이 있는 성찰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화’, ‘소통’에 초점을 맞추고 루쉰이 『들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는 데에 익숙한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실적 비관주의자 루쉰이 바라보는 삶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
그는 누구에게나 웃음 짓고, 모든 것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