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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감성

작성 : dang32g / 2010-03-28 23:55 (수정일: 2018-01-19 10:47)

선비의 감성

-고봉의 ‘樂’을 중심으로-

 

김경호(전남대 호남학연구원)

 

 

균질적이지 않은 삶의 세계, 공간의 비균질성을 애써 외면하면서 불합리한 현실을 정처없이 부유하는 나는, 무엇을 욕구하고 무엇을 욕망하는가? 불가해한 운명의 시간 속에서 던져진 나는, 길이 있음에도 길을 보지 못하고 길안에서 길찾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나는, 무엇을 찾고자 함인가?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으로서 현대인이 체감하는 현실감은 이성에 의해 직조된, 균질적이라고 믿고 있는 구성된 이 세계가 임시적이고 가상적인 꿈같은 세계는 아닐까 하는 덧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며 상실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사라짐’에 대한 근본적 불안과 두려움은 그래서 더욱 완고하고 자기완결적인 사리정연한 ‘틀’을 요구하고, 또 집요하게 구성하고자 한다. 이분법적이고 분절된 사유에의 집착과 매달림에 의하여 허기진 몸과 마음은 병들고, 비움을 용납하지 않는 끊임없는 채움의 결핍에서 비롯한 소외와 불안은 존재의 고독을 가속화시킨다. 가중된 소외와 심화된 불안은 사회적 고립감과 연대감의 상실로 나타나고, 이로 인하여 현대인은 타인을 불신하면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파괴적인 존재를 양산한다. 이러한 시대에 소외와 불안을 극복하고 타자와의 공존과 공생을 모색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고 대대적 등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하여 생명의 원리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진정한 참의 세계와 참나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의 논의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나는 전통시대의 특정 계층을 지칭하던 ‘선비’라는 존재를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전통시대의 지식인 관료 계층을 지칭하던 ‘선비’라는 존재를 이상시하거나 하나의 완결된 모델로 상정하여, 그대로 선비의 인격을 답습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선비 혹은 선비의 인격, 선비정신에 대한 논의는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져 왔고, 또한 선비의 공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고,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나는 ‘완결된 인격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선비’를 만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긍정적 선비의 의미를 재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선비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간으로, 전통시대에서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의 구현자로 표상되며, 이들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적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타인에게 따듯한 정을 베풀 줄 아는 성숙한 인격적 존재라고 이해되고 있다. 과연 그것은 사실일까? 역사적 현실을 살았던 ‘선비’라는 존재를 ‘몰역사적인 보편틀’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한가?

나는 유학에서 논의하는 ‘선비’라고 하는 존재와 인격은 그 의미를 표상하는 문자적 변화[儒․士․士大夫․士君子․士林․士類․士族]처럼 시대와 공간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당대의 문화적 이상과 사상적 지향을 함축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선비’라는 개념은 삶의 시간과 의미의 그물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다층적인 개념적 지층을 갖고 ‘구성된 용어’임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선비’ 혹은 ‘선비정신’이란 용어는 암묵적 동의가 아니라 엄밀하게 제한적으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그 한 경계를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고봉 기대승은 우리가 기존의 통념으로 알고 있던 우아한 도덕적 품격과 이상적 지향만을 지닌 존재만은 아니다. 고봉은 도학자이기 이전에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현실의 부조리함에 고통받고 좌절하여 분개하고, 술을 통해 주어진 규율을 넘어서려한 격정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고봉은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직면한 세계상 속에서 기쁨과 슬픔, 사랑과 우울을 시를 통해 표현해 내는 감수성이 예민한 정감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결함과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적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선비’라고 하는 긍정적 인격이 다양한 삶의 시간과 의미의 거미줄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보며, 고봉이 추구했던 인격의 어떠한 측면이 선비의 풍모라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는 고통받는 현실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한 인격의 한 단면을 고봉을 통해서 엿보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또한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선비의 감성 표현 양상을 고찰하는 것이기도 하며, 호남유학의 한 지점을 점유하는 고봉의 감성을 탐색해 보는 시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