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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항화가 조희룡의 미감과 19세기 화단의 변화

작성 : dang32g / 2010-03-28 23:58 (수정일: 2018-01-19 10:47)

여항화가 조희룡의 미감과 19세기 화단의 변화

 

이선옥(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목 차>

 

 

 

1. 머리말

2. 조희룡 예술의 감성 기저

  1) 여항인으로서의 ‘울분’

  2) 문인화가로서의 ‘자부심’

3. 그림에 표현된 미감

  1) ‘격동(激動)’의 미

  2) ‘담(淡)’의 미

4. 맺음말

 

 

조선시대 회화사에 있어서 19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대내외적인 여러 사건들과 열강의 각축으로 다사다난하였으며, 학술적으로는 청(淸)나라 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이 들어와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종래의 엄격한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점차 완화되고, 중인계층의 문화적 학술적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로써 ‘여항문인’들은 창작 뿐 아니라 감평(鑑評)·수장(收藏) 등 서화와 관련된 제반 활동에 중추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문인화가였던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궁중의 말단직을 지낸 여항인이었지만 시서화의 탁월한 재능을 바탕으로 여항인 뿐 아니라 김정희 권돈인 등 사대부들과도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그는 훗날 ‘묵장의 영수’로 불릴 만큼 여항화가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이 화근이 되어 김정희가 두 번째 북청으로 유배를 가던 1851년 63세에 김정희의 심복이라는 죄목으로 전라도 신안의 임자도에 유배되었다. 이때 조희룡의 유배기간은 김정희의 유배기간인 8개월보다 훨씬 긴 19개월여에 걸쳐 있었다. 직접적인 죄가 아니었음에도 유배기간이 더 길었다는 것은 그의 신분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극명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은 신분상의 제약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거리낄 것 없는 일생을 보냈다. 그 자신이 시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평양 조씨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15세 손으로 고조부 대까지는 당상관의 벼슬을 이어왔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여유 있는 삶이었다. 그러나 증조부 태운(泰運)이 서얼이었던 듯 이후 중인가계로 바뀌어 여항인으로 살게 되었다.

때문에 조희룡의 의식에는 문인화가와 여항화가라는 양면성이 공존하였다. 문인화론이 문인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온 뿌리 깊은 의식이었다면 여항화가로서의 미의식은 현실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에서 비롯된 새로운 의식이었다. 이러한 조희룡의 미의식은 같은 여항인이자 김정희의 제자였지만 김정희의 미감을 전수하여 남종문인화의 대를 이었던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1)과 대비되어 나타나 흥미롭다.

본 발표에서는 한국회화사상 가장 다양한 화풍이 공존하였을 뿐 아니라 근대기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활동하였던 여항화가 조희룡의 예술적 감성은 어떠하였으며, 이러한 감성이 그의 작품에 어떤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궁극적으로는 조희룡으로 대표되는 여항화가들의 미의식이 19세기 화단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시대 화풍변화와 이를 이끈 화가들의 감성과의 관계를 밝히고, 더 나아가 다양한 층위로 존재하는 우리 문화예술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