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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사회참여 動因으로서의 감성

작성 : dang32g / 2010-03-29 00:09 (수정일: 2018-01-19 10:45)

지식인의 사회참여 動因으로서의 감성

-1978년 ‘교육지표사건’을 중심으로-

 

김창규(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목 차>

 

 

 

1. 왜 교육지표사건인가?

2. 대학도, 학문도, 교수도 없다!

3. 부끄러운 것도 없잖아?

4. 인간이 정의 없이 살 수 있겠는가?

5. 역사가 되다.

 

1. 왜 교육지표사건인가?

 

유신정권은 교육을 철저하게 국가에 예속시켜 독재체제의 강화와 반공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권력의 시녀로 삼았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억압당하고 그럼으로써 국민들의 사고는 더욱더 경직되어 갔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은 억압의 권력과 인간 및 자연을 훼손시키는 부당한 권력이 저지른 갖가지 사회 부조리를 열거하고 진실과 인간의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을 재개하자면서, 당시의 교육을 실패로 규정하고 이른바 <우리의 교육지표>를 선언하였다.

핵심 주장은 첫째,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둘째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셋째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넷째 3ㆍ1정신과 4ㆍ19정신을 충실히 계승ㆍ전파하여 겨레의 숙원인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었다.

선언 이후 11명의 교수는 전원 해직되었고, 이어진 학생 시위자 중 14명이 기소되었으며, 이들 학생 중 15명이 제적되고 9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는 희생을 치러야만 하였다.

교수와 학생들의 큰 희생을 가져온 교육지표사건은, “민주화의 횃불 당기게 한 불씨”(김현곤), “대학 자율성ㆍ정의ㆍ민주화 향한 첫걸음”(명노근) , “80년 5ㆍ18로 이어지고 또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를 민주화시키는 역동적인 역할”(안진오), “5ㆍ18민주화운동의 사상적 자양분 제공”(신일섭), “민주 투쟁의 싹을 틔운 귀한 씨앗”(윤한봉), “80년대 연대투쟁의 길 열었죠”(문승훈), “학생운동 장작불에 기름 끼얹었죠”(김선출) 라고, 당시의 서명 교수 및 학생들은 그 의의를 말하고 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5ㆍ18 민주화운동의 계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지표선언 서명 교수와 이를 지지하면서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들이 이후 전개되는 민주화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2년 후인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잉태하는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나아가 교육지표선언을 통해 드러난 민주주의를 향한 양심과 열정이 이후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을 통해 면면히 계승ㆍ발전되어 왔음이 이왕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구는 유보하고자 한다.

필자의 관심은 교수 11명으로 하여금 ‘감히’ 유신교육에 도전케 만든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교육지표사건은 권위주의적 통치와 그 이념적 음모에 맞선 비교적 ‘희귀한 지식인 운동’이었다.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그 신분의 특성상 억압의 현실에서도 대체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4ㆍ19혁명 성공이 확실해진 4ㆍ적으에 발표된 교수단 성명과 6ㆍ3사태 때 서울대 교수들의 화해적 성명이 고작이었다. 정부 비판적인 경향으로 해직된 교수들이 반정부적인 행동을 취하는 일은 알려져 있지만 현직 교수가 집단으로 체제에 도전한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정부 비특권계급인데 사회적 지위, 명망, 모든 것을 보아서나 정말 좋은 자리였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고 그것도 투옥될 각오를 하고, 교수들이 서명을 한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었다. 정말 보통 결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한국사회는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라고 할 정도로 억압과 공포의 시대였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교수로서의 불이익과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인지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누구라도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지극히 무모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과 행동을 ‘감히’하게 한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성 근저의 그 무엇이 있었을 법하다. 교육지표사건과 관련되어 양심, 양심 교수, 교육적 양심, 학문적 양심, 대학인의 양심, 양심의 회복 등 ‘양심’이라는 문제가 필자의 관심을 끈다. 良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르고 착한 마음이며,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고 명령하는 도덕의식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양심을 “경고를 해주고 충고를 해주는 내면의 소리”라고 정의하였다. 맹자는 “사람은 모두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고,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결국 양심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맹자는 “부끄러움이 사람에 있어서 매우 크다,“사람은 염치가 없어서는 안 되니, 염치가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치욕스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면서,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義’의 싹”이 양심이라고 정의하였다. 인격자가 되기를 희구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정신적 목표이었던 ’義‘는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을 통해 깨우치는 셈이다. 필자가 앞서와 같이 목차를 구성하여 지식인의 사회참여 動因을 더듬어보려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