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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감성동원

작성 : dang32g / 2010-03-29 00:13 (수정일: 2018-01-19 10:44)

파시즘과 감성동원

-일제하 ‘국민문학(國民文學)’에 대한 고찰-

 

정명중(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목 차>

 

 

 

Ⅰ. 문제제기

Ⅱ. ‘대변하는 자’라는 허구

Ⅲ. 자기혐오 또는 노스탤지어

Ⅳ. 순종적 신체에 대한 동경

Ⅴ. 나오며

 

Ⅰ. 문제제기

 

이 글은 기본적으로 파시즘(fascism)이 대중의 감성(感性)을 조작․왜곡하거나 동원하는 방식 혹은 그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파시즘은 대중(피지배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요인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파시즘 형성의 유일한 또는 지배적 경로는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통상적 의미의 독재와 파시즘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파시즘 형성의 다양한 경로를 추적하다보면, 그것이 오히려 대중의 자발적 동의와 합의에 기초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자발성과 합의란 이데올로기적 허구이자 가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허구임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동원 체제에 매우 이질적인 대중들이 일제히 공명(共鳴)하게 되는 일체화 혹은 동일화의 심리적 혹은 감성적 메커니즘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가를 면밀히 탐구하는 일이다.

히틀러의 나치체제는 독일의 사회주의적(또는 사민주의적) 경향의 지식인 그룹뿐만 아니라 기층 노동자 및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 속에서 더구나 민주(대의체제)적 형식과 절차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탄생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중들을 설득하고 동원하는가, 이것이 파시즘 체제의 관건이다. 아울러 그러한 동원이 대중들의 자발성과 합의에 기초한다는 합법성의 외양을 갖추면 갖출수록 파시즘 체제는 더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파시즘적 정치공학의 핵심은 비균질적이고 잡다한 그래서 분자적(molecular)인 대중들의 욕망을 하나의 일체화된 몰적(mole) 욕망으로 재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공학적 특징으로 인해 파시즘 체제는 항상 대중들을 동원하기 위한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수사학을 개발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수사학은 설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발견하는 기술, 이른바 완전히 또는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청자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또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청자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3가지의 증명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 곧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그리고 파토스(pathos)가 그것이다. 논리적 증명 방식인 로고스는 말 그대로 메시지의 논리적 정합성에 기대어 청자를 설득하는 것이고, 에토스는 화자의 권위나 신뢰도에 의지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토스는 감성적 일치(공감)나 감동을 통해 청자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파토스란 기본적으로 청자의 정념(情念)에 호소한다. 이러한 정념적 설득은 메시지의 논증성이나 이성적 요소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다만 메시지를 수용하는 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거나 혹은 가라앉힐 수 있는 요인과 동기가 무엇인지를 포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설득의 기술로서 파토스에 능하다는 것은 대중이 무엇 때문에 혹은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분노하거나 슬퍼하고 혹은 열광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계보는 다르지만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이 ‘기원의 신화’(나치의 게르만의 숲)와 같은 ‘초(超)-논리’ 내지는 ‘전(前)-논리’를 반복적으로 주장한다는 점, 매개적(형식적) 사유에 대한 혐오와 직접성(실감)에 대한 강박과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수사학은 대개 파토스적이다. 파토스는 감성적 일치와 공감의 기술이다. 한편 파시즘적 정치공학의 핵심이 대중동원이라고 할 때, 그러한 동원이 자발적인 동의와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합법성의 가상을 얻기 위해서는 감성의 동원(혹은 왜곡․조작)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파시즘의 논리(論理)’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물론 특정한 시점에서 파시즘이 형성되는 회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구조화할 수는 있겠지만, 정당한 의미에서 파시즘은 논리의 체계가 아니라 정념의 응축물(덩어리)에 더 가깝다.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적 선전 도구로서 혹은 정치의 심미화 기제로서 문학이 용이하게 선택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일제 시기 전시총동원 체제 아래 한국작가들에 의해 생산된 이른바 ‘국민문학(國民文學)’ 계열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러한 작품들이 일반 대중(독자)들의 감성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문학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다. 문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이를테면 감정이입, 거리두기, 각성 혹은 계몽, 미적인식, 쾌(불쾌) 등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혹은 장소에 따라 그 목적하는 바의 내용이 퍽 이질적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소기의 목적들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독자(수신자)의 설득이 원리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문학은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에 해당한다. 특히 목적(계몽) 문학 또는 이데올로기 선전문학으로서 ‘국민문학’은 문학의 그러한 설득적 기능에 대해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대중적 코드에 어떤 식으로건 부응해야만 설득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문학은 일제의 전시총동원 체제로 한국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감성적 기제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차용한 그러한 감성적 기제들이 순전히 그들의 머릿속에서만 고안되었을 리는 없다는 점이다. 곧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독자 대중들이 선호하는 감성적 기제들, 집합적(집단적) 표상이나 원망(願望) 혹은 평균적인 이상(理想)을 수사적 차원이나 표현의 층위에서 조율하고 반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국민문학 계열의 텍스트들이 대중의 무의식과 작가의 무의식이 교차하거나 아니면 그것들 사이의 암묵적인 조율의 과정에서 생산되었다는 게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결국 필자는 국민문학 계열의 작품들을 분석함으로써 특정 시기에 한국인이 어떠한 감성적 기제에 반응했는가를 추적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적 감성의 반복적 자질 혹은 ‘집요저음(執拗低音)’과 같은 것을 추출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로서 국민문학 계열의 텍스트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