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활동

분권 시대 횡단적 보편학으로서 감성인문학: 장소‧매체‧서사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

학술대회

기묘사림의 감성과 예술

작성 : abraxas701 / 2010-09-19 12:33 (수정일: 2018-01-19 10:26)

기묘사림의 감성과 예술

 

이 선 옥(전남대)

   

1. 머리말

2. 기묘사림의 비애와 예술활동

3. 예술로 표출된 기묘사림들의 감성

1) 사군자에 실은 절의

2) 산수화에 담은 은일

3) 영모화에 부친 기개

4. 기묘사림의 감성의 확산

1) 고운과 고경명의 의병활동

2) 양팽손의 절의정신과 양산보의 풍류

3) 윤구의 예술감성과 해남윤씨가의 예술

5. 맺음말

 

  1. 머리말

 

사화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과 예술과의 관련성을 논한다는 것이 어쩌면 부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묘사화를 단순한 정치적 사건으로 보기 보다는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정치에 실현시키고자 했던 사림들의 이상과 좌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부침과 더불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이상이 무엇이었던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을 즈음한 시기는 전후로 사화와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후 임진왜란(1592년)이나 병자호란(1636년)으로 이어지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문화 전반에서 새롭고 다양한 변화들이 진행된 역동적인 시기로 볼 수 있다. 조광조와 기묘명현들의 유배, 사사 등 사림들의 정치적인 퇴조는 일시적이고 표피적인 현상일 뿐, 오히려 향후 조선 사회는 이들에 의해 추진된 일련의 정치·사회적인 개혁이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화되고 내면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서화와 같은 문화예술방면에서도 이전 시기의 구습을 탈피하고 새로운 화풍을 준비하는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 사상을 기반으로 문인들의 회화가 발달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특히 영모화나 화조·사군자에서 한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이름 있는 화가들이 출현하였고, 이들의 화풍은 조선시대 회화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회화를 통해 학문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문인화가들이 등장하면서 기묘사림들 중에는 이 시기 회화사에 한 획을 그을 뛰어난 화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霞川 高雲(1479~1530), 學圃 梁彭孫(1488~1545), 沖菴 金淨(1486~1520), 靈川子 申潛(1491~1554), 猿亭 崔壽城(1487~1521), 그리고 서예가 金絿 등을 들 수 있다. 서화로 이름난 이들 외에도 이들과 절친하였던 尹衢((1495~1549), 朴祥(1474~1530) 등도 서화감상을 함께 하며 교류하였다. 이 중 고운은 광주, 양팽손은 능주 출신으로 조광조의 문인이다. 김정은 호남 출신은 아니지만 순창군수와 담양부사를 지냈으며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여 금산으로 유배되었고, 기묘사화로 제주에 杖流되었으며 그곳에서 賜死되었다. 신잠 또한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파방되어 장흥에 유배되었으며, 인종 때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목사를 역임하였다. 최수성은 강릉출신으로 호남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양팽손, 김정 등과 친하여 서로 간에 시를 주고받았다. 기묘사화에 연루된 문인화가 대부분이 호남과 연관을 맺고 있다. 이들은 호남 출신이거나 호남에서 관직생활을 하거나 호남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는 조광조가 화순 능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사되었던 것만큼이나 우연이라면 우연이며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